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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빨간 마후라' 원조 김영환 장군, 붉은 치마 옷감으로 머플러 급조

"빨간 마후라(머플러가 옳은 표기)는 하늘의 사나이…" 2006년 신상옥 감독의 장례식에선 공군 군악대의 연주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1964년 신 감독이 만든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가(쟈 브라더스 노래)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서울 명보극장에만 22만 관객이 몰린 히트작이었다. 지난해 7월 3일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빨간 마후라'를 디자인했다. 1950년 일본 전투기 F-51 10대를 인수한 지 단 하루 만에 훈련도 없이 10명의 공군이 북한을 향해 출격한 '조종사의 날'을 기념한 것이었다. 왜 '빨간 마후라'는 공군의 상징이 됐을까. '빨간 마후라'의 원조는 김영환 장군이다. 제일고보(경기고 전신)와 일본 관서대 항공과를 졸업한 그는 초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 장군의 동생이다. 김영환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영웅 리히트호펜을 좋아했다. 리히트호펜은 붉은색으로 칠한 전투기를 몰고 다니며 연합군기 80대를 격추한 사람이다. 붉은 비행기 덕에 그의 별명은 '붉은 남작(Red Baron)'이었다. 김영환은 리히트호펜 스타일의 모자와 장화를 착용하고 다녀 '멋쟁이 바론'으로 불렸다. 그는 장난기도 심했다. 항공기를 몰고 한강 다리 밑의 교각 사이를 누비는가 하면 이화여대 상공을 저공 비행해 학교 측으로부터 "시끄러워 수업을 할 수 없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빨간 마후라'를 처음 두른 건 강릉 10전투비행전대 전대장 시절이었다고 한다. 형수(김정렬 당시 공참총장의 부인)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문득 리히트호펜의 붉은 빛깔이 떠올랐는지 "조종복과 잘 어울리겠는데요"라고 한마디 했다. 형수는 치마를 짓고 난 자투리 옷감으로 그에게 머플러를 만들어줬다. 다른 설도 있다. 추락한 아군 조종사를 수색하는 방안을 논의하다가 눈에 띄는 빛깔의 머플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강릉 시장에서 인조견을 사와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른셋의 나이로 제1훈련비행단장으로 재직하던 54년 그는 F-51을 몰고 사천에서 강릉으로 가던 중 실종됐다. 빨간 머플러를 두른 채 하늘로 사라져 '번개처럼 지나가는 청춘'이란 노래 가사처럼 영원한 전설이 됐다.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7-19

[그때와 지금] 식민사관 앞장선 조선사편수회, 기생·게이샤 끼고 봄나들이 즐기다

1915년 6월 박은식은 일제에 나라를 앗긴 아프디 아픈 역사를 기록한 '한국통사'를 펴냈다. 그는 식민지 사람들에게 나라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 다시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그의 외침은 고요한 연못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였다. 작은 동심원의 궤적들은 점점 큰 원을 그리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이 땅의 사람들의 가슴에 독립에 대한 열망이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이 책이 나온 지 한 달 만인 1915년 7월 '조선반도사' 편찬 작업에 나섰다. "사람 마음을 현혹시키는 이 책의 해독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를 멸절시킬 방책만을 강구하는 것은 헛되이 힘만 들고 성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전파를 장려하는 것일지 모른다. 금압하기보다 공명 적확한 사서로 대처하는 것이 첩경이다." 일제는 한민족을 일본에 동화시켜 다시는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하고팠다.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전쟁은 그때 이미 시작되었다. 1919년 거족적 3.1운동은 우리와 일본인은 본래 한 핏줄인 '동족'이니 일본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억설을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한 한국사 왜곡과 사료 편찬 작업은 계속됐다.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됐다. 편수회는 '조선사' 37권을 비롯해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책과 자료집을 무수하게 찍어냈다. 일제 강점기 어느 봄날. 따사로운 봄볕이 싫지 않은 듯 차양 밖에 자리 깔고 모여 앉아 술잔을 나누는 조선사편수회 임원들의 야유회 사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기생과 게이샤가 함께한 야유회 자리에서 단군조선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깎아내린 이마니시 류나 구로이타 가쓰미 그리고 일제의 회유에 절개를 굽혀 민족사 왜곡에 일조한 최남선과 이병도 등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역사 왜곡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다시 한 번 불을 뿜을 모양이다. 아직도 일본의 역사시계는 뒤로만 가려 한다. 역사 왜곡에 맞서 싸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이에나가 사부로가 새삼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17

[그때와 지금] '정쟁 격심하니 내 각제 바람직' 헌법 기초한 유진오의 선견지명

1945년 8월 15일 한국인의 정치 참여 기회가 철저하게 막혀 있던 일제 식민통치가 종언을 고했다. 미군정하 우후죽순 격으로 솟아난 정치단체마다 헌법의 제정을 위한 초안 작성에 부심하던 그때. 당시 유일무이한 헌법 전문가였던 유진오(1906~1987.사진)는 그의 능력과 식견을 해방된 조국을 위해 펼칠 기회를 얻었다. 47년 그는 법전편찬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최초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하에 실시된 총선거 결과 제헌국회가 출범하였다. 6월 3일 국회는 그를 헌법기초위원회 10명의 전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했다. 7월 12일 만장일치로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국회의 심의를 통과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렸다. 유진오가 만든 초안은 90% 이상 원안대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의 반대에 부닥쳐 그가 꿈꾸었던 권력 구조인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중심제로 뒤바뀌고 말았다. 정파 간 다툼으로 국정이 난맥상을 보이고 개헌 논의가 봇물 터지듯 다시 일고 있는 오늘 '헌법의 아버지' 유진오가 남긴 고언(苦言)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나라의 격심한 정쟁의 현상으로 보아서도 이를 완화 또는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절대로 필요하며 그와 같은 인물이 없으면 정국은 파국적 단계까지 이를 위험성이 있으므로 실제적 견지로 보아서도 우리나라의 정부 형태가 정쟁에 초연한 원수를 가질 수 있는 의원내각제도로 추이하는 것은 희구할 만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통령제에 대한 그의 반론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 헌정사가 증언한다. 제헌절 61주년을 맞는 오늘 내각책임제를 꿈꾼 그의 선각이 마냥 그립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16

[그때와 지금] 중세 유럽인이 꿈꾼 '외계 나라' 대항해 시대 여는 촉진제 역할

안철수연구소의 설립자인 KAIST 안철수 교수가 얼마 전 TV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군대에서 손과 발이 작아 군화를 제일 작은 것을 신었으나 머리가 커서 철모는 제일 큰 것을 썼던 사실을 밝히며 "화성인 취급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우주 저 멀리에 사는 외계인이 인간과는 외모가 다를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통념이 잘 드러난 에피소드다. 요즘은 '지구 바깥'이 외계지만 15세기 말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전 유럽인에게는 '유럽 바깥'이 외계였다. 유럽 내부에 고립된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슬람세력은 러시아 스텝 지역에서 북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뻗으며 동쪽과 남쪽에서 유럽을 포위했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했다. 이교도에 둘러싸인 기독교 세계의 위기의식이 투영된 것일까. 15세기 유럽인들 사이에는 '사제 요한'의 기독교왕국 전설이 퍼져 있었다. 중세 전설에 따르면 사제 요한은 네스토리우스교 또는 콥트 기독교의 사제이자 왕이었다. 사제 요한의 왕국은 유럽을 포위한 이슬람세력 저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유럽인은 사제 요한을 찾아내 동맹을 맺을 경우 협공으로 이슬람세력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사제 요한의 왕국에 대한 유럽인의 상상력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곳에는 유니콘들이 뛰어다니고 사자의 몸통에 독수리의 머리.날개를 가진 전설의 동물 그리핀들이 황금을 지키고 있었다. 왕국에는 괴상한 모습의 인간들(그림)이 살고 있었는데 얼굴이 어깨 아래쪽에 달린 사람 부채 같은 거대한 발이 달린 외다리로 뛰어다니다가 낮잠을 잘 때는 발을 해 가리개로 사용하는 사람 새 머리가 달린 사람 허리 아래가 말처럼 생긴 사람이 있었다. 사제 요한은 이렇듯 기상천외한 별천지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성에 살았다. 중세 유럽인들은 사제 요한과의 '접속'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품고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중세적 꿈이 뜻밖에도 근대를 연 셈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보고에 따르면 태양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297개의 별 주위에서 모두 353개의 행성체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를 찾기 위해 앞으로 15년 동안 우주선들이 속속 발사될 예정이다. 21세기판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머지않아 외계인의 존재도 확인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외계인의 모습을 이런저런 기괴한 형상으로 멋대로 상상하곤 하지만 혹 지구 밖에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15

[그때와 지금] '힘없는 자는 늑대 떼 속의 양' 열강 외면 속에 이준 열사 순국

1907년 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준은 순국했다. "우리나라를 도와 달라. 일본인들이 우리를 짓밟고 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고종이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사진 왼쪽부터.국사편찬위원회 제공)을 밀파한 이유는 평화회의 앞 친서에 잘 나타난다. "강포한 이웃의 침략이 날로 심해져 외교권과 자주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우호의 정의와 약자를 돕는 의리를 베풀어 여러 우방들이 널리 의논하여 우리의 독립과 국세를 지키게 해주오." 그러나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정치 현실은 냉혹했다.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영국 대표에게 이준은 항변했다. "오늘 영국 대표의 말은 조.영 수호조약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약소국가를 박해하는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국의 신사도는 그렇게도 강약에 따라 변하는 도인가?" 그러나 그의 외침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평화회의는 약자를 돕는 회의가 아니었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인류가 아닌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였다. 을사조약은 국제적으로 논의될 소지가 없었으며 한국이 주권을 앗긴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7월 20일자 뉴욕 타임스의 기사는 당시 분위기를 잘 전해 준다. "결국 조선은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전쟁의 희생물이 될 운명이었다. 지난 전쟁에 대한 판정이 변경되지 않는 한 조선의 완벽한 일본화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후 고종은 강제 퇴위되었고 군대는 해산되었으며 정미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은 더욱 훼손되었다. 이준을 헤이그에 묻은 이틀 뒤인 9월 5일 특사들의 임무는 끝났다. 그때 우리의 친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맞아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등대로 다가서는 오늘. 징전비후(懲前毖後)의 리더십에 목이 타 들어간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14

[그때와 지금] 영국 여왕의 '007 스파이' 존 디, 20세기 들어 제임스 본드로 부활

1527년 7월 13일에 태어난 존 디(John Dee 1527~1608.그림)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영국 소설가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스파이 영웅 제임스 본드가 다름 아닌 존 디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 드물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야 하는 무거운 과업을 짊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므로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등장한 여성 군주 그것도 전례 없는 '미혼' 여성 군주라는 점에서 영국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웠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대륙의 정세를 탐색하고 민감한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스파이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학자로서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던 디는 여왕의 가장 비밀스러운 업무를 맡아 해결하는 스파이로 활동하게 됐다. 연금술사.점성술사.수학자인 디는 젊은 날 프랑스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소개하면서 범유럽적인 명성을 얻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와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디를 자국의 궁정 수학자로 임명하겠다고 앞다퉈 제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디는 모두 거절하고 엘리자베스의 총애와 후원을 받으며 국정의 민감한 사안에 조언자로서 활동하는가 하면 유럽 대륙에 건너가 스파이로서 여왕의 외교 책략에 도움을 줬다. 암호명인 007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디 사이의 사적인 외교 문서에 사용된 독특한 표식이었다. 디는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말미에 '두 눈'을 나타내는 두 개의 원을 그린 다음 7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자신은 여왕의 비밀스러운 눈이고 그 눈은 '성스러운 행운의 숫자'인 7에 의해 보호된다는 의미였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13

[그때와 지금] 손잡은 '건국의 아버지들'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시민사회의 역사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의 십자포화처럼 엇갈린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아치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깃발이 다시 나부끼는 오늘. 우파는 해방 후 우리 역사를 서구가 2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부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번영을 지키기 위해 제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북한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제국에 당당히 맞설 민족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좌파는 우리 현대사를 외세와 그 기생 세력에 의해 동족상잔과 대량학살이 자행된 그리고 독재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로 치부한다. 이들에게 김구는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 세우기의 당위성을 일깨우는 아이콘으로 우뚝 선다. 그러나 이승만은 민족에게 고통을 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정권욕에 사로잡혀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평행선처럼 합치하지 않는 역사기억은 우리 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 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민족독립운동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 대통령을 맡은 이승만과 1940년 주석에 오른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6년 봄 민주의원 회의를 마친 후 악수를 나누는 사진 속 이승만(왼쪽)과 김구처럼 우리 시민사회도 서로 부딪치는 역사기억을 넘어서기 위해 화해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건너야 할 강물에 놓인 징검다리의 첫째 디딤돌이 될 터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10

[그때와 지금] 러시아 차르 흉내내려던 고종, 국민국가 수립 여망 저버리다

한 세기 전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약 13년간 존속한 대한제국 시기는 국민국가 수립을 꿈꿀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 특히 민권을 외치던 독립협회(1896~98)가 해산된 뒤 이 과제를 두 어깨에 짊어진 이는 고종이었다. 그의 지도력에 대한 당대의 세평은 호평과 악평이 대척점을 이룬다. 대한제국 이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896년 10월에 나온 '코리언 레퍼지터리'는 "폐하는 진보적이다. 서양인들 제도들과 관습들에 적대적이지 않다. 그는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최근 수년간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해 그의 지도력과 '진보적' 정치성향을 호평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들어서고 입헌군주제를 세우려 했던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고종에 대한 반감은 높아만 갔다. 의회 설립을 주도했던 윤치호는 1898년 11월 5일자 일기에 '독립협회 해산과 헌의(獻議)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칙령'을 발포한 고종에 대한 실망감을 강하게 표출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제정 러시아에 기대어 등장한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1899년 8월 17일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 따르면 황제는 육해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명권 조약체결권 사신임면권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 복장을 입은 고종(사진 왼쪽 옆은 순종)의 모습이 웅변하듯 그때 고종은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따라 배우려 했던 인권의 시대 근대를 역행한 전제군주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09

[그때와 지금] 중세엔 죄악을 뜻하던 줄무늬, 미 독립 계기로 '자유의 상징'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시원스러운 줄무늬의 '성조기'다. 1789년 7월 14일의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삼색기'다. 둘 다 공통으로 줄무늬를 채택했다. 줄무늬가 서양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3세기 중반 가르멜수도회 수도사들이 줄무늬 망토를 걸치고 파리에 들어오면서였다. 그때 파리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면서 그들을 경멸했다. 중세 유럽인들에게 줄무늬는 곧 '다양성'을 의미했다. 요즘은 다양성을 젊음.관대함.활달함 같은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중세에는 다양성이 죄악과 지옥을 연상시키는 개념이었다. 그런 인식은 동물에게도 적용되어 호랑이.하이에나.표범 같은 줄무늬 동물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중세 말기에는 심지어 얼룩말마저 잔인한 동물로 간주하면서 '사탄의 지배를 받는 동물'에 포함시켰다. 중세 기사도 소설에서 영웅은 언제나 백마를 타고 나타나지만 배신자.악당.이방인은 여러 색이 섞인 말을 타고 등장하는 것이 정석처럼 되어 있었다. 부정적 이미지의 줄무늬는 1920년께 미국 앨커트래즈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기결수의 옷차림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사진).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간수 가운데는 중범죄자 오른쪽은 탈옥하다 잡힌 재범자다. 긍정적 의미의 줄무늬는 1776년 미국 독립혁명과 더불어 획기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낭만과 혁명'을 뜻하는 줄무늬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줄무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유럽에도 급속히 퍼졌다. 프랑스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지하고 영국을 적대시하면서 미국적인 것에 끌렸다. 미국의 건국 초기 13주를 뜻하는 13줄의 깃발은 자유 등 새로운 이념의 상징물로 부각되었다. 이때부터 줄무늬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줄무늬 옷을 입는 것은 영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삼색기를 비롯해 다양한 줄무늬를 채택했다. 줄무늬 옷을 입는 것은 애국자임을 드러내는 일이자 혁명 이데올로기를 적극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줄무늬 연미복을 착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삼색기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원형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삼색기의 아류에 해당하는 국기가 유럽 각국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20세기 군사.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18세기 이미 '줄무늬'로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고 있었던 셈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08

[그때와 지금] 서양 정보 국민과 공유한 일본, 국왕과 측근들만 돌려 본 조선

1871년 11월 일본 요코하마의 부둣가에서 구미제국을 순방하기 위해 출항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배웅하는 행사가 열렸다. 사절단을 이끈 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그림 가운데 작은 증기선의 일본옷 입은 사람)와 부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귀국 후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실세들이었다. 이들은 정부 각 부서의 중견 관리 41명과 유학생 43명 등 100여 명을 이끌고 장도에 올라 1872년 9월까지 1년10개월 동안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러시아.이탈리아.스위스 등 구미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둘러보았다.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사절단을 따라갔던 역사가 구메 구니타케에 의해 총 5권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라는 책으로 활자화 출판돼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되었다. 그가 "사절의 모든 성과를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편집.간행"한다고 책머리에 썼듯이 천황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자신들의 경험을 국민과 함께 나누었다. 10년 뒤 일본을 따라 배우려 했던 조선의 조사시찰단(1881년 5~8월)은 그들이 거둔 성과를 담은 80여 권의 보고서를 고종에게 올렸다. 그러나 붓글씨에 능한 아전들이 두 달에 걸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손으로 쓴 비단 표지를 입힌 이 책들은 국왕과 일부 위정자들의 정책결정용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았다. 한 세기 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근대를 향한 '시간의 경쟁'에서 우리가 뒤처진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자명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07

[그때와 지금] '수십 년 익힌 무공도 소용 없다' 화약, 중세 유럽의 '비대칭 전력'

핵무기는 군사적으로는 '비대칭 전력'으로 불린다. 전차.대포.함정 같은 기존 전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무기인 데다 단 한 발만 사용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대칭 전력은 중세 서양에도 있었다. 화약이었다. 화약은 중국에서 발명됐지만 그것을 파괴적 목적으로 처음 사용한 것은 중세 말기 서유럽이었다. 대포는 1330년께 처음 사용됐다. 초기의 대포는 너무나 원시적이어서 대포 앞쪽보다 뒤에 있는 편이 더 위험하곤 했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성능이 크게 향상돼 전쟁의 양상을 뒤바꾸기 시작했다. 대포는 1453년 두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대포를 이용해 유럽에서 가장 함락하기 어렵다던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렸고 프랑스군은 보르도를 함락함으로써 백년전쟁을 종식시켰다. 역시 14세기에 처음 발명된 총은 그 후 점차 완성도가 높아졌다. 1500년께 이후 새롭게 등장한 '머스킷 총' 덕분에 기병은 일거에 보병으로 대치됐다. 창검을 손에 익히고 말을 다루는 데 일생을 바친 고귀하고 용맹스러운 귀족 기사들은 기사도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천민 출신 보병의 총 한 방에 목숨을 잃을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 베르가모의 디시플리니 성당에 있는 1485년의 프레스코화 '죽음의 승리'(그림)는 화약 등장 무렵의 정서를 표현했다. 총은 희생자의 나이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한 방'에 보낼 수 있으며 우리의 마지막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절망적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06

[그때와 지금] 요절 예고한 '배호 사망설' 소동

1968년 7월. 한 TV의 '가요일번지' 프로그램 PD의 작업실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배호씨가 정말 죽었나요?" 비슷한 질문이 50여 통이나 이어졌다. 이미 한 차례 대성통곡을 한 듯 목이 잔뜩 쉰 여성들도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인기가수 배호가 지방 공연을 펑크내자 관객들이 흥분했다. 엉겁결에 나선 사회자가 "어제 병이 도져서 입원했는데 그만…"이라고 둘러댔다. 좌중이 울음바다가 됐다. 소문이 번지자 방송국에도 확인전화가 몰린 것이었다. 물론 사망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42년 4월 24일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배호(본명 배만금.사진)는 광복군 배국민씨의 장남이었다. 많은 독립투사의 자녀들처럼 그도 가난에 시달리며 자랐다. 12인조 배호 밴드를 결성해 서울 낙원동 프린스 카바레 등에서 명성을 떨쳤다. '도라지'란 말을 외국어처럼 살짝 굴리는 데뷔곡 '두메산골'은 독특했다. 그 자신도 "제 창법이 '참 건방지게 멋있다'는 말을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66년 신장염이 발병했다. 하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에서 취입할 때는 한 소절 부르고는 털썩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날의 신곡이 바로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그가 노래한 용산의 입체교차로는 94년 철거되고 배호 노래비만 남는다. 71년 병세가 악화되자 병상에서 '0시의 이별'과 '마지막 잎새'를 녹음했다. 헐떡이는 숨결과 끓는 가래가 그대로 느껴지는 최후의 노래다. 공연 출연도 했다. "죽어도 노래하다 죽겠다"면서. 음악만 틀어놓고 무대에 그대로 서 있던 때도 있었다. 그해 11월 7일 배호는 운명했다. 11일 예총회관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소복 입은 젊은 여인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섰다. 이상국〈문화칼럼니스트〉

2009-07-05

[그때와 지금] '1000명 당 5개 꼴' 귀한전화, 지금은 휴대전화만 4500만명

1902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공중전화가 개통돼 민간에서도 전화를 쓸 수 있게 됐다. 그해 5월에는 서울과 개성 사이를 잇는 전화선이 가설됐으며 다음 해 2월에는 평양에까지 그 선로가 연장됐다. 그러나 '문명의 신경망' 전화를 자력으로 놓으려던 대한제국 정부의 힘겨운 노력은 1905년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물거품이 돼버렸다. 일제 강점기에 전화는 수탈과 지배를 위한 침략과 사찰의 도구였지만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문명의 이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 전화 보유에 있어 민족적 격차는 너무도 컸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21일자 기사는 일제 식민지하 일그러진 '발전'의 서글픈 사연을 잘 들려준다. '조선인의 서울인가 일본인의 서울인가.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아도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1000인마다 일본인은 60인 다른 외국인은 37인이 전화를 가졌는데 서울의 주인인 조선인은 5인밖에 아니 된다. 어찌 전화뿐이랴. 조선 내에 있는 철도 윤선 탄탄대로 우편 전신 이러한 모든 문명의 이기는 그것을 설비하는 비용과 노력은 조선인이 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는 일본인이 한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는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약하게 하고 천하게 하기에만 이용되었고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아직 이용되지 못하였다'. 광복과 함께 공간을 문명화할 통신 주권은 회복되었지만 19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전화는 여전히 귀한 물건이었다. 전화를 갖기 위해 권력에 기대는 청탁행위가 비일비재했던 그 시절에는 남에게 가입권을 팔 수 있는 '백색전화'와 사용권만 주어진 '청색전화'가 있었다. 유선전화가 2200만 회선을 웃돌고 휴대전화 가입자 수 4560만을 헤아리는 오늘 앞선 세대의 청백 두 가지 색깔 전화에 대한 회고담은 이 땅의 청춘들에게 마치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터이다. 사실 궁내부와 여타 행정부를 잇는 관용전화망은 1896년께 이미 개통돼 있었다. 그해 9월에는 관용선의 통화권이 인천의 감리서까지 연장됐는데 그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 김구 선생이다. '백범일지'를 보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을 죽인 선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종이 친히 인천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혹 그때 칙명을 연결한 교환수가 100회선짜리 자석식 교환기 앞에 상투 틀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람(사진)일지도 모를 일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03

[그때와 지금] '차관 도입 자립경제 이루자' 경제개발계획의 '원조' 어윤증

인간이 사물을 보는 인식의 폭과 깊이는 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과 견문한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어윤중(1848~1896)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미양요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던 1871년까지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은 유교의 도그마였다. 그러나 그는 개항 이후 박규수를 만나 개화사상에 눈뜨고 특히 1881년 조사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의 근대 문물을 살펴보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사진(독립기념관 소장)은 그때 일본에서 찍은 것이다. 시찰 후 그는 당시 국제 정세가 약육강식의 춘추전국 시대보다 더 생존 경쟁이 심하므로 나라를 살릴 길은 부국강병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일본은 이상적 개혁 모델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처럼 군주는 군림하되 정권은 근대적 개혁을 도모하는 정치세력이 잡는 집권적 정부 세우기를 꿈꾸었으며 정부 주도 아래 재벌을 기르고 외자를 들여와 산업을 일으킬 생각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같은 꿈을 꾼 김옥균이 성급하게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 역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의 개혁 구상은 1894년 갑오개혁 때가 돼서야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800만원의 차관을 들여와 산업을 일으켜 3년 뒤엔 빚을 다 갚고 자립경제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심 찬 계획은 1896년 아관파천 후 보은으로 몸을 피하던 중 폭도에 의해 한창 일할 49세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으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외자도입을 통한 산업 일으키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실천한 국가건설 내지 경제개발 전략의 원형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02

[그때와 지금] 노예선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무죄' 평결로 정의 지킨 미 법원

1839년 7월 2일 쿠바에서 32㎞ 떨어진 해상에서 노예로 팔려가던 53명의 아프리카인이 반란을 일으켜 아미스타드호를 장악했다. 그들은 백인 2명만 살려두고 선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목적은 오직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항해 기술이 없었기에 그들은 살려둔 백인 2명에게 키를 맡기고 아프리카로 가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백인들의 속임수로 흑인들은 두 달 뒤 북쪽 코네티컷 해안에서 미 해군 함대에 붙잡혀 살인 혐의로 감방에 갇혔다. 이 사건은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아미스타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1839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해안 시에라리온의 노예 수용소로 납치된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 건너 쿠바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스페인 노예 상인 2명에게 팔려 6월 27일 아미스타드호에 실린 채 아바나 항구를 출발했고 5일 후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 목숨을 건진 백인 2명은 노예 상인이었다. 그들은 낮에는 아프리카를 향해 동쪽으로 가는 척하다가 밤이 되면 방향을 바꿔 북아메리카 해안을 이탈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중 미 해군에 발견되어 8월 27일 미국 땅에 도착해 연방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1840년 1월 법원은 아프리카인이 자유인이므로 정부 감독 아래 아프리카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 기간 내내 감방에 갇혀 있던 아프리카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스페인 간의 조약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아프리카인들을 스페인의 재산으로 인정하고 반환해야만 했다. 아프리카인을 자유인으로 본 미국 법원과 상반된 시각이었다. 스페인 정부에 대한 의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연방 대법원에 항소를 제기했다. 행정부가 사법부를 압박한 셈이다. 이 재판에서 제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1767~1848.사진)가 74세의 고령으로 아프리카인을 위해 변론을 맡았다. 1841년 3월 9일 대법원은 아프리카인들이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므로' 자유인의 권리가 있고 따라서 노예 상인들의 재산이 될 수 없다고 평결했다. 아미스타드 사건은 심각한 국론 분열을 야기했고 남부와 북부의 의원들은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20년 뒤 결국 남북전쟁이 터졌다. 그러나 미국은 큰 대가를 치르면서도 '정의와 도덕적 권리'를 끝까지 지켜냈고 미국이 치른 희생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사법부가 '도덕적 신념'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등장은 어렵지 않았을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7-01

[그때와 지금] '한국 위하는 범위 내에서 친일' 내선일체 옹호한 윤치호의 변명

윤치호(1864~1945)는 17세 나던 1881년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1883년 5월 2년 남짓한 그의 유학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때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가 그 말고는 없었기에 3개월 배운 영어실력으로 초대 주한 미국공사의 통역이 되어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통해 그는 일본의 경험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믿고 따르던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 때문에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당시 윤치호의 부친 윤웅렬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미리 점쳤다. 아들의 일본 유학을 권하고 최초의 근대식 군대 별기군을 만들 만큼 그는 앞서서 깨어 있었다. 군복 차림에 칼을 찬 이가 그(사진=국사편찬위원회)이고 그 뒤에 선 이가 윤치호다. 1888년부터 1893년까지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을 다니며 미국의 번영이 기독교라는 정신적 가치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 제도에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때 품은 이상을 좇아 귀국 후 독립협회 운동을 주도한 한국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는 영국.러시아 같은 제국의 지배를 문명화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고려하거나 일본과의 인종적 연대가 백인종의 침략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한 '비애국자'였으며 일제하에서는 독립 무용(無用)론을 주장하거나 내선일체를 지지한 '소신 친일파'였다. 한 개인의 처신에 대해 단죄하기는 쉽다. 그러나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까닭을 밝혀내는 것이 우리 근대사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깊게 하는 데 더 보탬이 되는 길이 아닐까 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30

[그때와 지금] 아이 낳으면 수당·면세·융자 '아리안족 늘리기' 열 올린 나치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인종 말살정책은 독일 역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수치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인종정책의 이름으로 자행된 가공스러운 행위들은 극단적으로 사악한 양상으로 발전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바람직하지 않거나'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범주의 사람들에게는 성적 자유 및 출산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1월 1일 이후 인종 및 계급에 따른 강제 불임과 출산 제한은 제반 법령을 통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아리안족 부부들에게는 다산을 장려했고 아리안족 여성들의 산아 제한 권리를 폐지했다. 낙태는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나치는 초창기의 한 법령을 통해 남편이 직장을 가진 기혼여성의 경우 공직 취업을 금지했다. 결혼을 원하는 젊은 남녀에게는 저리의 융자금이 제공되었는데 신부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아이들이 한 명 태어날 때마다 출산 수당을 지급하는가 하면 갚아야 할 융자금과 세금을 줄여줬다. 다섯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의 경우 세금을 완전 면제해줬는데 이는 모두 독일제국을 완전히 순수한 새로운 인종으로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여성을 '자식을 낳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정주부는 낳는 아이의 수에 따라 다양한 등급의 '어머니 십자훈장'을 받았다(사진).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지 벌써 4년이 되었지만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국가적 재앙 수준이다. 2016년부터는 일할 수 있는 인구가 감소하리라는 전망이다. 잔인한 인종주의와 여성의 자율성 상실이라는 나치 독일의 행태에 소름이 돋지만 그들의 출산 장려 정책 자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6-29

[그때와 지금] 월남 김상사 돌아온 지 36년

"아 잘있어라 부산항구야. 미스김도 잘있고요 미스리도 안녕히." 백야성의 노래가 울려퍼지면 군인들은 함상에서 따라 부르면서 목이 멨다. 그 무렵 "부우우웅" 뱃고동이 운다.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된 것은 1965년 7월 2일이었다. 10월에 해병 청룡과 맹호부대가 참전했다. "돈 많이 벌어와서 대학 갈 겁니다. 돌아오면 예쁜 색시랑 결혼할 거예요." 가족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그들은 떠났다. 66년 6월 26일자 한 신문은 베트남 패션을 소개한다. 뒷머리를 상고머리로 치켜 깎는 '베트콩 커트'. 통바지에 밑이 넓어지는 '아오자이 슬랙스' 발등만 걸고 굽이 높은 '꼬 샌들'이 여름철 한국의 여심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한다. 아오자이는 그곳 여성들이 입는 옷이고 '꼬'는 베트남어로 아가씨란 뜻이다. 68년 7월 10일 베트남에서 작전 중이던 강진성이란 일병은 호랑이를 잡아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한국정부기록사진집 제7권). 69년 춘천여고 응원단장 출신의 여대생 한 명이 신중현의 녹음실을 찾는다. 신씨는 그에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데뷔곡을 준다. 김추자의 섹시한 율동 속에서 터져나온 신바람나는 김상사 스토리는 베트남 참전에 바친 최고의 헌사였다. 2009년 7월 월간중앙은 '철군 36년…고엽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전쟁 당시 게릴라가 숨은 삼림지역의 나뭇잎을 없애기 위해 미군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제초제를 살포한다. 장병들은 적의 은폐물이 사라지는 게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 땅에서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이는 12만 명이다. 93년 그들을 진료하기 위한 법률이 만들어졌으나 혜택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2009-06-28

[그때와 지금] '미래를 준비하라' 부친 가르침, 해군 창설로 답한 손원일 제독

올해는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1909~1980) 제독 탄생 100주년이다. 중국 지린성 문광중학을 졸업할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부친 손정도 목사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들려주었다. "지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간절히 독립을 바라지만 일본이 곧 망하거나 금방 독립이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실력을 갖춰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 앞으로는 과학사회와 산업사회가 전개될 것인데 그때는 개인의 실력과 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살라는 부친의 훈화는 그의 삶을 이끈 나침반이자 등대였다. 16세 되던 1925년 '후테이센진' 즉 '요주의 조선인'으로 일제의 경찰기록에 이름이 오를 만큼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는 27년 대륙 제일의 항구 상하이를 보고 바다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3년 뒤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자마자 독일 연습선에 승선해 항해기술을 더 연마할 기회를 얻었다.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을 맞아 그는 해군 만들기에 나섰다. 45년 8월 21일에는 해사대를 그리고 11월 11일에는 해군의 뿌리가 되는 해방병단을 세웠으며 48년까지 38척의 함정도 확보했다. 49년 12월 17일 뉴욕 부두에서 열린 백두산호 이양식에 참석한 장면 주미대사(사진 가운데) 왼쪽의 제복 입은 이가 손 제독이다. 그의 선견지명은 6.25전쟁의 승패를 가른 인천상륙작전 때 빛났다. 그는 미국에서 들여온 백두산호를 비롯한 4척의 전함에 자신이 창설한 해병대를 태우고 선봉에 섰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6-26

[그때와 지금] 학문으로 신념 표출한 막스 베버, 우리 대학가 '폴리페서'에 경종

자본주의 발전에서 종교의 역할을 강조한 사회학자로 널리 알려진 막스 베버(1864~1920.사진)는 독일의 국가주의.권위주의.관료주의에 맞서 싸운 비판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독일제국의 역사(1871~1918)와 거의 일치한다. 독일은 1871년에 이르러서야 서유럽 국가들 중 마지막으로 통일을 이룬 '지각한 국가'였고 통일의 중심에는 토지귀족 출신의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베버와 그가 속한 시민계층은 정치적으로 비스마르크의 '아들'이었다(김덕영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그들은 비스마르크가 구축한 독일제국에서 태어났고 그 기반 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시민계층은 자신을 '아버지'인 귀족계급과 동일시했다. 문화적.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독자적 사회집단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봉건화.귀족화되어 가고 있었다. 베버는 비스마르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독일 통일의 업적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서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독일에서는 시민계층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세력이 통일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베버는 인정했다. 국가의 통일은 아버지의 업적이므로 아들은 이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미는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만약 무대에 계속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지금까지의 공로도 퇴색하고 말 것이었다. 이제 아들이 역사의 무대에 설 차례였고 그 아들은 다름 아닌 시민계층이었다. 서울대가 '폴리페서'들을 규제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오히려 양성화하는 내부 규정을 마련했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보류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권력'을 택하건 '학문'을 택하건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학생 수업권과 대학 운영에 지장을 주는 인사들이 과연 개인적 영달을 넘어서서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할 수 있을까.

200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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